그날, 아버지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산골 서당의 훈장이던 아버지는 국민학교(초등학교)도 나 오지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문맹의 동네 청년들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든 가리지 않고 가르치고자 했다. 농한기에 문을 연 서당에는 동네 청년들이 모여 들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아버지는 다리가 한쪽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군에서 주최한 체육대회에 나가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넘어져 다리 가 골절되었다. 의술이 어두운 시절이라 병원에는 가지 않고, 집에서 낫겠거니 하면서 습부濕敷만
나는 많이 울었다.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나도 함께 아프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파서 울었지만 울어서 아프기도 했다. 빨간 프라이드로 50만 킬로미터를 달리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학생 138구의 시신 옆에서 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하는 아이들보다 항상 못하는 쪽, 힘든 쪽의 아이들 곁에 서 있고 싶었다. 모범적이고, 특기가 많고, 따뜻한 가정의 아이들은 저만치서 지켜만 봐도 잘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굴에 상처와 원망, 그늘과 한숨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아니, 쫓아갔다. 돌아보니 ‘교육’이라는 무거운 단어를